서울의 아리랑 고개는 돈암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일제 때 고급 요정이 있어 아리랑 고개라 했다는 설과 또 망국의 설움과 한을 저항으로 노래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그곳에서 찍었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중구에도 아리랑 고개가 있었는데 민요 ‘아리랑’처럼 이별을 서러워하는 의미다. 광희문은 성안 백성이 죽어 성 밖 화장터나 공동묘지로 갈 때 지났던 문으로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 이때부터 광희문 근처를 죽어서 넘는다는 아리랑 고개라 했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갔다고 하면 흔히 ‘세상 떠났다’라는 뜻이 되었다. 신당동은 광희문을 지나간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성 밖 무당들이 신당(神堂)을 차리고 살았던 데서 비롯됐다. 그때 우리 어머니, 아내, 누이는 억울하게 숨져간 아버지, 남편, 오빠의 영혼을 달래겠다며 신당의 무당을 찾아 굿을 했다. 막강한 권력 앞에 할 수 있는 게 그 뿐이었다. 지금도 신당동엔 몇몇 신당이 영업 중이고 무당용품 백화점까지 있다. 또 무당집 콘셉트의 이색 칵테일 바도 생겨났다. 지금도 한 번씩 가보면 침 맞는 대추나무(사진) 등 조금은 별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당동은 1894년 갑오개혁 때 동명에 차마 귀신 神을 쓸 수 없어 神堂과 발음이 같은 新堂으로 표기하며 유래했으나 그 이전 영조 때 수성책자(守城冊子)에 신당리계로 처음 나타난다. 1910년 일제 때도 신당리동으로 했다가 해방 후 일본식 동명을 우리식으로 바꿀 때 성동구 신당동이 되었고 1975년 중구로 편입되었다.
▲ 신당동 대추나무에 침을 놓은 모습
신당동 얘기에 떡볶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 옛날 입맛 없어 하던 왕에게 어느 종가에서 떡과 갈비를 양념간장에 볶아 올렸는데 맛이 좋아 궁중요리가 됐다. 1800년대 말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궁중에서 흰떡과 등심살, 참기름,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을 넣어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80년대 동대문구장 고교야구와 함께 전성기를 맞았는데 지금은 추억의 음식이 되어 10여 곳 남아있단다.
김성섭(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