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동(水標洞)은 조선의 고종 31년 갑오개혁(1894)때 수표교동이 되었는데 청계천 수표교 때문이다. 유가증권 수표(手票)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1910년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며 경기도 관할이 됐다. 1913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으며 1914년 일본식 수표정(町)이 되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으로 수표정은 수표동(洞)이 되었다. 수표로에 있는 서울중부경찰서는 원래 조선의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 어진을 모셨던 영희전 터였다. 광해군 때 설치한 남별전을 숙종 때 영희전으로 고쳤고 그런 까닭에 역대 임금들은 수시로 영희전을 찾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요인경호가 잦았던 곳이다.
광복 후 미군정 시절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창랑 장택상이 바로 수표동 91번지에 살았다.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에 수도치안을 맡아 경무부장 유석 조병옥과 경찰 바로 세우기에 헌신하였는데 수표동에서 무려 7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며 테러범도 대부분 현장에서 검거하였다. 1946년 11월 13일 수표동 자택에서 출근하던 장택상은 괴한 2명이 수류탄을 던지고 권총을 난사함에 따라 재빨리 응사했으며 경호 순경과 추격 끝에 범인들을 체포하였다.

1948년 1월 24일 역시 장택상은 장교동 앞에서 또 괴한에게 수류탄 저격을 받았으나 무사하였고 곧 범인을 잡았으며 공범 4명도 수도경찰청이 일망타진하였다. 조병옥과 장택상을 제거하려 한 그들의 목적은 경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나아가 좌익세력의 확장을 꾀하려던 데 있었던것 같다.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과 초대 외무부장관을 거쳐 3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4선 의원과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했다.
장택상의 집 가까운 수표동 99-1에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가 살았고 국가보훈부에서 표지판을 세웠는데 장택상의 흔적은 없다. 오는 10월 21일은 81번째 경찰의 날이다.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초창기 수도치안을 이끌었던 장택상이다. 창랑이 그리운 이유다.
김성섭(서경대 특임교수·수필가)
- 등록일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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