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초동 동명은 재미도 있고 또 황당하다. 옛날부터 초전골이라고 불러왔다는데, 해석은 좀 다르다.
제1설은 역성혁명을 일으킨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정안군 이방원(이성계와 첫째 부인 한씨 사이 5남)은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왕위를 노렸으나 계모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복동생 방석(8남)이 세자로 책봉되며 상황은 어려워졌다. 결국 방원은 이복동생 방번(7남)과 방석, 개국공신 정도전을 살해한다. 1398년 8월 26일 발생한 1차 왕자의 난이다. 태조 이성계는 상왕으로 물러나고 첫째 방우가 이미 병사한지라 둘째 방과가 세자로 책봉되었고 2대 정종으로 즉위했다. 상왕 이성계는 “내 아들이지만 동생을 둘씩이나 죽이고 개국공신까지 살해하며 왕위를 노리는 방원을 살려둘 수 없다”며 당장 잡아들이라고 펄펄 뛰었다. 하여 이성계의 관군과 방원의 사병이 광화문부터 대치하였는데 방원은 차마 아버지 군대와 맞설 수 없다며 지금의 명동성당 입구까지 물러났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방원은 결국 칼을 뽑아 아버지의 관군과 첫 싸움을 벌였다.

그 때부터 이곳은 ‘처음 싸운 곳’이라는 뜻으로 초전(初戰)골이라 불렸으나 백성들은 부자지간에 싸웠다는 게 불편하고 비교육적이라 생각했다. 방원은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으로 등극한다.
제2설은 초전동의 유래가 원래 이엉으로 불리는 개초(蓋草)와 삼으로 불리는 마(麻) 그리고 칡으로 불리는 갈(葛) 등을 가공치 않고 그대로를 파는 초물전(草物廛)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풀草와 가게 廛을 써 초전동(草廛洞)이었다고 한다. 물론 初戰이 草廛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암튼 초전동은 줄여서 곧 초동으로 바뀌었다. 초전골이었다는 건 어느 정도 믿을 만한데 草廛이었는지 初戰이었는지는 가늠키 힘들다. 나는 初戰으로 기울어 있다. 얘기가 제법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3설로 草田을 말하기도 한다. 초동은 영락교회와 중부경찰서 바로 앞 동네다.
김성섭(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