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애국지사들과 인연도 많다. 나석주 의사 동상과 표석이 있고 그 유명한 이회영 6형제의 집터를 거쳐 이재명 의사 의거 터가 있다.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한 후 항일공작요원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후 황해도 평산에서 왜경과 면장을 살해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경무국에서 근무하다가 약산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6년 다시 국내로 잠입해 한국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왜경 경감 다하타 유이지 등을 사살한 후 순국하였다.
34살에 순국한 나 의사는 폭탄 의거를 준비하며 숱한 어려움을 생생히 적은 7점의 편지를 김구 선생에게 보냈는데 마침 2024년 광복절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 편지를 전시했었다. 크지 않은 나석주 의사 동상과 표석을 둘러보고 명동성당을 향해 걷다 보면 이회영 6형제 집터가 있다. 1867년 명동에서 태어난 이회영과 형제들은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강탈당하자 6형제가 전 재산을 처분하고 가족과 일부 노비들까지 60명이 그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후 거액의 배삯을 쥐어주자 놀라는 뱃사공에게 ‘독립운동 하러 강을 건너는 사람이 돈이 없으면 잘 보살펴 달라’고 했다. 만주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6형제가 한마음이 되어 고국산천을 떠나는 심경이 어떠했으랴? 이후 6형제가 중국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겪은 고초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3번 찌른 후 왜경에 잡혀 사형을 당하며 목숨은 빼앗아도 충혼은 뺐지 못한다고 했다. 취조 과정에서 공범을 묻는 왜경에게 2천만 동포 모두가 공범이라고 했다. 남산1호 터널 입구에 남산 우당 이회영기념관이 있는데 추석 때 가족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김성섭(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