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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우리동네 역사산책] 서소문동은 정미의병 발원지이다!
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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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동은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중 서소문에서 유래하였다. 120년 전인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명을 보내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지만 무산됐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07년 8월 1일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을 무장 해제하였다. 민심은 들끓었고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이 해산에 반발해 자결하자 격분한 남상덕, 이준영 참위가 이끄는 약 1,500명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숭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이 이미 탄약고 및 주요 화기를 선점 당해 패배하였다. 이후 탈출한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의병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정미의병이 시작되었는데 그 표지석이 서소문동 120-23 부영빌딩 뜰에 있다.

정미의병 발원터

이 나라는 의병이 지킨 나라다. 수많은 외세 침략이 있었고 그때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것은 백성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속수무책으로 밀리자 임금은 몽진에 나섰다. 이때 경남 의령에 머물던 곽재우는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켜 첫 승전보를 전한다. 한양으로 물밀듯 진격한 왜군에게 절실한 건 군량이었다. 현대전에서도 보급은 매우 중요하다. 한양으로 진격한 왜군 선봉대 보급 추진을 위해선 경상도보다 곡창지대 전라도를 장악해야 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바닷길이 막힌 왜군은 내륙 길로 호남에 진출코자 야간에 의령으로 침투해 왔다. 왜군 정찰대가 낮에 길을 살피고 철수하며 진흙탕을 피하고자 세워둔 팻말을 곽재우는 수렁 쪽으로 돌려놓았다. 매복으로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왜군을 섬멸한 의병은 임란 첫 승전보를 전한다. 곽재우 의병이 승리한 1592년 4월 22일이 양력으론 6월 1일이다. 2008년 의령군수가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제정하자고 청원해 호국보훈의 달 6월 첫날을 ‘의병의 날’로 정했다.

김성섭(수필가)

202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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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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