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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우리동네 역사산책] 영도교에 한번 가보자!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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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을 나와 청계천을 따라가면 첫 다리가 황학동 근처의 청계7가 영도교다. 조선 초 태종 때도 있었던 유서 깊은 다리로 폐세자 양녕대군 일행이 건너 왕심평대교라 했다. 다리의 사연은 슬프다. 1452년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병사하고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어린 단종과 정순왕후는 영도교 앞에서 헤어졌는데 이 다리를 건너가신 단종이 살아 돌아오지 못해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 혹은 두 분의 슬픈 이별 장면을 본 사람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해 붙여진 이름이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도교를 건너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1457년 마침내 죽임을 당하여 차디찬 동강에 버려졌다. 다행히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가 동강과 서강이 합쳐지는 합수머리에서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곳이 지금의 장릉이다. 영도교를 함께 건너지 못하고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 송 씨는 창신동에 유폐된다. 소복을 한 채 아침저녁으로 뒷산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절과 곡을 하였다.

영도교

그 후 영조는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씨를 하사했다. 동녘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정순왕후도 폐위되어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걸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들을 가엾이 여긴 정순왕후는 아주까리로 염색을 해주고 대가를 받아 끼니를 연명했고 그래서 자줏골이라 했다. 이런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여인네들이 채소장사로 위장하여 감시 눈을 피해 푸성귀나마 던져 주었다. 자연스레 여인들만의 시장이 형성되어 금남시장(禁男市場)이라 불렸다. 성종 때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개축했으나 조선 말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며 석재로 써 다시 나무다리로 놓았다. 하지만 자주 떠내려가 한동안 징검다리로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운동장과 경성제대가 들어서며 콘크리트로 개축했고 1959년 복개 때에 사라져 2005년 청계천 복원 때 다시 만들었다. 시국이 어수선해도 정월 대보름 땐 영도교에 한번 가보자.

김성섭(수필가)

202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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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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