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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우리동네 역사산책] 방산동에서 애민군주를 생각하다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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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동은 청계천 준설과 도성 안 연못이나 하천을 만들며 생긴 흙이나 모래를 쌓아 산처럼 만든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에 꽃을 심고 꽃다울 방(芳)과 뫼산(山)을 쓴 데서 동명이 유래했다. 하지만 방산동에서 유래한 방산시장은 정작 주교동에 있고 방산동엔 훈련원공원이 있다.

한성은 옛날부터 수해로 골머리를 앓았다. 큰 비가 내려 때때로 궐 안까지 물이 찼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물난리 원인을 산림의 무차별 남벌로 적고 있다. 삼각산 봉우리가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특히 한성의 중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은 골칫거리였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이 넘쳐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자 임금은 안타까워하며 준천(濬川)을 결정하고 임시관청 ‘준천사’를 설치해 호조판서를 공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지금은 강바닥 토사를 걷어내고 하천을 정비하는 걸 준설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준천이라 했다. 연인원 21만 명이 넘는 인부들이 소를 부려가며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 대대적인 공사를 끝냈다.

방산시장

영조는 자신의 의지로 실행된 국책사업 청계천 준천에 관심이 컸다. 임금은 그해 3월 10일 광통교로 납시었고 공사 막바지인 4월 9일 비바람을 뚫고 청계천을 찾아 오간수문(五間水門) 위로 납신다. 영조가 친히 현장을 둘러보는 장면은 몇 장의 그림으로 그려져 ‘준천계첩’으로 전해진다. 준천계첩 중 임금이 오간수문 위에서 일하는 백성들을 지켜보는 그림은 유명하다.

이렇게 청계천 준설로 생긴 방산동의 이야기꾼들은 또 하나의 얘기를 전한다. 인공으로 만든 조산은 청계천변에 사는 빈민들이 살았는데 조산에 땅굴을 파고 생활한대서 ‘땅꾼’이라 했다. 이들은 청계천 공사가 끝나고 더는 일자리가 없어 굶기가 일쑤였다. 이를 딱히 여긴 영조가 고심 끝에 뱀을 잡아 파는 독점권을 줬다. 이에 땅굴에 산대서 땅꾼으로 불리던 이들이 뱀 잡는 사람으로 통용되었다. 집도 없이 땅굴에 사는 빈민들을 위해 그나마 먹고 살게 해준 애민군주 영조를 다시 생각한다.

김성섭(수필가)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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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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