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지금 25개 자치구가 있지만 조선 후기엔 동서남북중 5부가 있었고 중구는 남부에 속했다. 구청과 동사무소처럼 부에는 부사무소가 있어 부동(部洞)이라 했다. 부동은 ‘붓골’로 불리다 동명으로 표기하며 생뚱맞게 필동(筆洞)이 됐다. 필동에는 조선의 한성을 수비하던 금위영의 남별영과, 일제강점기 땐 조선통감부 통감관저와 일본헌병사령부가 있어 우리를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해방 후엔 국군헌병사령부와 수도경비사령부가 있다가 헌병사령부는 1972년 용산, 수경사(현 수방사)는 1991년 남태령으로 옮겼다. 필동은 원래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는데 날씨와 계절에 관계없이 나막신을 신고 딸깍딸깍 다닌 청빈한 선비들을 국어학자 이희승은 ‘딸깍발이’라 했다. 한옥마을 서쪽에 그의 추모비가 있다. 인구 4천 남짓의 필동은 냉면과 한옥마을로 유명하다. 1998년 문을 연 한옥마을은 삼청동 옥인동 등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한옥 5채를 골라 옮겨왔다. 그중 순정효황후 윤씨 친정 쪽 집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황후의 부 윤택영 집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백부 윤덕영 가옥으로 밝혀졌다. 황후는 1906년 13살에 조선의 황태자 계비로 책봉되어 1907년 마지막 임금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매 황후가 되었다.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다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3·1운동 후 오빠 윤홍섭을 통해 10만원 상당의 거액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6·25 땐 피난 갈 새 없이 들이닥친 인민군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은 당찬 분이다. 다른 얘기도 있다. 33세에 순종을 보내고 영어와 피아노 커피를 즐기며 홀로 지내다 1966년 72세에 돌아가셔 40년 만에 남편 곁에 묻혔다. 필동과 한옥마을은 이런 한의 역사를 품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름깨나 날린 인물들의 옛집을 보고 가는데 아련한 역사의 한 토막을 알고 가는지 모르겠다.
▲ 남산골한옥마을 입구
김성섭(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