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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우리동네 역사산책] 정동에 정릉이 있었다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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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피와 한이 서려 있지 않은 때가 어디 있으랴만 중구 정동만한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정동은 원래 정릉동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정동이 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1396년(태조 5년)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40세에 승하하자 ‘도성 10里 밖 100里 안’의 원칙을 깨고 아예 도성안에 무덤을 썼다. 강씨는 태조의 경처였고 향처 한씨는 즉위 10개월 전에 승하해 조선 첫 왕비는 신덕왕후 강씨였다. 한씨는 둘째 아들 정종이 신의왕후, 다섯째 아들 태종이 태후로 추존하였다. 태조는 총애하던 20살 연하 강씨가 죽자 수시로 무덤을 찾아 사무치는 애틋함으로 3년 상을 챙겼다. 방원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둘째 형을 2대 정종으로 옹립하고 세제 아닌 세자에 올랐다가 1400년 마침내 3대 태종으로 즉위한다. 태종은 계모이자 이복동생 방석의 어미로 어린 방석을 세자로 만든 신덕왕후 강씨 무덤이 성안에 있는 게 못마땅해 태조가 살아있음에도 무덤 주변 땅을 측근 하륜 등에게 나눠줬다. 심지어 태종은 신덕왕후 기일이 되어도 조회를 하거나 형식적인 제사를 지냈다. 늙은 태조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고 마침내 정릉을 파헤쳐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능(陵) 아닌 묘(墓)로 옹색하게 옮겼다. 태종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는 날 많은 비가 쏟아져 백성들은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수군거렸다. 250여년 뒤인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의 건의로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도 비가 하염없이 내려 백성들은 역시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했다. 정릉을 장식했던 석물들은 1410년(태종 10년) 청계천에 광통교를 놓으며 백성들이 밟고 다니도록 석재로 사용했다. 얼마나 원한이 컸는지 석물에 새겨진 인물(신장상)들이 거꾸로 쳐박힌 채 지금까지 그대로 복원돼 있다. 정동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제일교회 국립정동극장옛 러시아공사관아펜젤러기념공원이 있다. 10월은 정동 가기 좋은 계절이다.

정동제일교회 전경
▲ 정동제일교회 전경

김성섭(수필가)

2024년 10월호
2024년 10월호
2024년 10월호
  • 등록일 :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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