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섭(수필가)
장충단은 1882년 훈련도감 군인들이 급료 체불과 급여로 받은 양곡에 겨와 돌이 섞여있고 정량이 부족한 데 격분해 일으킨 임오군란 때 희생된 영의정 이최응과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 희생된 군부대신 홍계훈, 궁내부 대신 이경직의 영령을 추모키 위해 1900년 고종이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원이라 할 수 있다.
장충단은 예로부터 경치 좋기로 유명했고 조선시대에는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 분소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이다. 고종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건립해 장충단을 꾸몄고 충성스런 충신열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봄가을에 두 차례 제사를 올렸다. 하지만 일제는 1908년 제사를 중단시키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되었을 때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열기도 했다. 1910년 마침내 장충단을 폐사하고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에 따라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그곳에 놀이 시설을 설치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한다며 그의 이름을 딴 박문사를 세웠다. 그러다가 결국 일제는 상하이 사변 때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의 정신기지로 삼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 박문사와 일본군 동상은 철거됐고 박문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신라호텔이 들어섰다.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할 때 장충단으로 이전한 화강암의 수표교는 조선 초(1420년쯤)에 만들어진 다리인데 아직 튼실하다. 이후 이준 열사와 사명대사,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세워졌고 3・1운동 기념비와 이한응 열사 기념비가 세워져 애국충정이 깃든 민족공원이 되었다. 동명 장충동은 이 장충단에서 유래하였다. 순종황제가 황태자 때 썼다는 앞의 「獎忠壇」과 뒤의 충정공 민영환의 글이 새겨져 있는 장충단비는 원래 한남동 쪽에 있었으나 공원 입구로 옮겨져 쓸쓸히 남아있다. 장충동하면 소주 한 잔과 원조 족발만 떠올렸었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추석엔 장충단에 한번 가보자.
☞ 중구광장 9월호부터 수필가 김성섭 님의 ‘재미있는 중구역사 이야기’가 소개됩니다.